자동차 정비 시뮬레이터와 게임의 만남 '더 렌치'
자동차 정비 시뮬레이터와 게임의 만남 '더 렌치'
  • 안일범 기자
  • 승인 2019.06.07 1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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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는 약 2만 5천개 부품으로 구성된다. 작은 쇠덩어리 하나가 모여 부품이 되고, 부품을 모아 길이 5미터, 폭 2미터 공간내에 배치함으로서 자동차는 생명을 얻는다. 그렇다면 이 부품들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 여기 한 개발팀이 차량 정비 시뮬레이터를 출시했다. 프로젝트 '더 렌치'. 렌치 하나를 들고 자동차 부품을 하나부터 이만오천개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차량 정비 VR 시뮬레이터다. 

'렌치'는 VR 게임이다. 시뮬레이션 장르를 표방한다. 레이싱 자동차를 분해해보고, 수리해보는 역할을 담당한다. 처음에는 타이어를 교체하는 직원으로 시작해 완전 주행 장비를 정비하고, 아예 엔진을 뜯어 고치는 자리까지 올라설 수 있다. 과정은 놀랍도록 세밀하다. 동전크기만한 부품들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나열해 꽂고, 붙이고, 돌리고, 떨어진 부품을 찾고(?), 다시 붙이고, 메뉴얼을 뒤적이다가, 선을 연결하고, 빠진 부위가 없는지를 점검한다. 단 한개 부품이라도 잘 못 배치됐거나, 방향이 틀리거나, 분실됐다면 클리어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겁먹을 필요는 없다. 다행히 부품을 가공하는 수준까지 내려가지는 않는다. 주요 기능을 하는 부품들 위주로 편성돼 조립하는데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은 충분히 복잡하고, 세밀하다. 게임이다보니 새로운 형태 '직쏘 퍼즐'을 맞추듯 부품들을 끼워넣는 형태로 즐길 수 있는 점이 장점이다. 반대로 차량 구조와 엔진 구조 등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기가막힌 장난감이다. 

이 같은 게임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가상현실 기기 덕분이다. 작업실 공간을 모델링하고 부품을 배치한 뒤 공간 내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기술이 핵심이다. 그 과정에서 천개에 달하는 부품들이 실시간으로 동작하는데, 개발팀은 이를 기가막히게 최적화 해냈다. 프로젝트 개발 전 부터 VR콘텐츠들을 개발해온 경험이 빛을 발했다. 드로우 콜을 줄이고, 라이트닝을 대체하는 방법으로 개발을 완수해냈다. 시각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는 소형 부품들에는 그림자를 줄이고, 임시 안티얼라이싱을 도입해 리소스를 확보했다. 여기에 유저들의 PC사양에 따라 최적화가 가능하도록 설계해 자연스럽게 동작하는 시뮬레이터를 완성해 냈다. 

놀랍게도 게임은 단 두명이서 만들어 냈다. 그래픽작업, 프로그래밍 모두 개인 작업물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완성도를 지닌 이유에 대해 개발팀은 언리얼엔진을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꼽았다. 블루프린트와 같은 기법, 스크립트 작성 간편화 등이 핵심기능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그들은 밝혔다. 특히 개발자 둘 모두 프로그래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물리 기술이나 광학 기술을 쓸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완성된 게임 '더 렌치'는 게임 그 자체 뿐만 아니라 학습용 교재로도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일례로 스팀 구매페이지 댓글란을 보면 해외 교육자들이 교재로 활용하겠다고 밝힌 댓글들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국내도 가능성은 있어보인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대구공업대학교 박병호 자동차학과장은 "'렌치'는 엔진 조립 과정을 퀄리티있게 만들어낸 프로그램으로 게임 보다는 시뮬레이터에 가까운 퀄리티"이라며 "실제 엔진 구조와 가능한한 흡사하면서도 직접 부품 위치를 보고 원리를 체험해볼 수 있는 시뮬레이터를 2만원에 구매할 수 있는 점은 경이로운 일"이라고 답했다.

박 교수는 실제 엔진이 300KG에서 400KG가 넘어가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교육하기 힘든 부분들도 문제 없이 할 수 있는 점이 장점이라 평했다. 무거운 엔진을 자유롭게 돌려가면서 볼 수 있도록 설계됐을 뿐만 아니라, 엔진 내부를 깊숙하게 들여다 보면서 작동원리를 파악할 수 있는 점도 가장 큰 장점이라고 봤다. 특히 타이밍 벨트 포지션을 확인할 때 현장에서는 마킹된 선을 보고 하게 되지만, VR환경에서는 엔진 내부를 직접 봐가면서 원리와 함께 설명할 수 있는 점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를 실제 교육과정에 응용할지 여부에 대한 질문에 그는 "하다못해 트레일러 영상을 보여주는 것 만으로도 당장 유용한 자료가 될 정도로 수준높은 콘텐츠"이라며 "단순히 영상하나만으로도 최소 8시간 이상 강연할 퀄리티가 나오며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는 제품"이라고 답했다. 

기존 사업분야에 가상현실을 활용해 시너지를 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줄을 잇는다. 교육, 설계, 시뮬레이션 등 분야에서는 이미 일반화된 일이다. 이제는 역으로 관련 분야에서 활용되던 시뮬레이터들을 게임화해 출시하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양 분야가 시너지효과를 내면서 함께 발전하는 시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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